정의의 월계관/법과 세상

4. 19혁명을 예고한 3.15부정선거( 三一五不正選擧)

윤이보헬로리 2016. 3. 15. 21:23

4. 19혁명을 예고한 3.15부정선거( 三一五不正選擧)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부정선거로 1960년 4월의 마산은 연일 시위가 계속됐다. 시민들이 숨지고 시가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3월 11일 합포만 중앙부두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채 떠오른 김주열군(당시 17세)의 시신이 발견되고, 3월 12일 부산일보 1면에김주열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사진이 커다랗게 실렸다. 당시 마산 주재기자로 있었던 허종씨가 담은 이 한 장의 사진은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이 사진은 AP통신에 의해 전 세계에 타전됐다.


1960년 3월 15일 선거에서 대통령 이승만은 12년간 지속된 장기집권체제를 연장하고,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에 이기붕(李起鵬)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규모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전국적으로 유령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으나 하향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표(85%), 이기붕 833만 표(73%)로 발표하였다.


전국적으로 유령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이 자행되었다.


1960년 3월 15일, 3.15 부정선거에 항의해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이 중심이 돼 시위가 일어났다. 처음엔 평화적 시위로 시작됐지만 이를 강제로 해산시키려는 경찰과 대치하면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다.


격분한 시민들은 경찰서를 비롯해 국회의원, 경찰서장의 자택을 습격하고, 이 과정에서 일곱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진압되던 시위에 불을 지핀건 행방불명 됐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 군이다. 김 군의 참혹한 시신이 바다에 떠올랐고 이에 분노한 온 시민이 또 다시 궐기해 경찰의 만행을 규탄했다.


부정선거 주범격인 내무장관 최인규가 교체되고 (법무장관이던 홍진기-홍석현 현 중앙일보 회장의 아버지, 삼성 이건희의 장인-가 내무장관이 되었다. 그래서 4.19 경찰 발포의 최종 책임자로 이후 재판받고 징역을 살게 된다)


국회 조사단이 파견되는 등 수습책이 모색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4월 11일의 시위 과정에서 실종되었던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다시 마산 시민들은 격렬하게 시위했다. 한편 시신의 처참한 모습은 부산일보의 사진 제공을 통해 중앙지들에도 대대적으로 그대로 보도되었다. 부산일보는 탄압을 피하기 위해 그런 편법을 택했다.


마산의 3.15시위와 4.11시위는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마산의 3.15시위는 물론 4.11시위가 없었다면 4.19는 없었다. 부산일보 등의 현지 언론은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일조했다. 이와 같이 마산과 부산 사람들은 유달리 정의감이 강했고 용감했다.


마산시민의 항의는 인근으로 확산돼 마침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3.15의거는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자 모태였다.


3.15의거는 4.19혁명의 그늘에 가려 독자적인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유는 국가보훈법을 만들때 4.19범주 속에 3.15를 넣어버린 것이다. 4.19혁명 속에 3.15가 파묻혀 버린 것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3.15의거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점이 강조됐고, 마침내 의거 발생 50년 만인 2010년 기념일로 지정됐다. 마산 시민들만의 기념일에 머물렀던 3.15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지정됨으로써 그 위상이 높아진 것이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마산 앞바다에 버릴 때 사용된 차를 운전한 김덕모씨가 2016년 3월 13일 오후 국립 3.15묘역에 있는 김주열 열사 묘소에 헌화하고 있다. <속죄하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