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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관한 詩

윤이보헬로리 2016. 10. 29. 14:28



 추수 - 손정모

늦여름 햇살까지 꽉꽉
이랑 가득 채우고도
가만히 들녘에 서면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두려움

올해의 수확은
그 얼마나 되며
수지 타산은 맞을까
마음, 자꾸만 무거워지지만

과거에 휩쓸려 스러진
숱한 햇살과 땀방울에서
극락조의 꿈으로 빚어지는
알곡의 환생을 본다.

 

 

추수 감사 -  김경희

만경들판
평화평야
넘실
 
고개 숙인
벼, 벼, 벼들께
올리나니
나의  거수경례

가을 지평선 끝까지. 

 

 

가을걷이 - 강인호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풀벌레소리
엄마의 노래랑 한숨도 따라왔으리
햇살 한 줌 비 내음도 묻어왔으리
자식 보고픈 그리움도 담겨왔으리
부모님이 가을걷이를 보내주셨네

 

 

들녘의 여울 - 권동기

낙엽에 묻힌
가을걷이 뒤의 한톨
어머니의 품안처럼
따사로이 잠든
풍년의
씨앗들
낙엽밟고
가는
나그네.

 

 

만복대 - 권경업 
  
만복대 능선에
흰억새 피면
한낮의 붉은 고추
양철지붕에서 졸고
운봉 인월 넓은 벌엔
가을걷이 한창이다
 

 

 

가을걷이 - 이문조

노오랗게 익은 벼
탐스런 벼 이삭

감나무 가지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감

가을은
단지 떠나는 계절이 아닌
거둬들이는 계절이다

벼를 수확하고
감을 따고
고구마를 캐고

오십 년 이상 자란
나의 인생 나무
무슨 열매가 얼마나 열렸는지?

 

 

만족 - 조예린

 

소슬바람
벌써 서리 깊어졌다고
한양 우리 서방님은 근심 짓지만
서방님
서방님
염려마세요
가을걷이 곳간마다
오곡이 차고
님 없을 적
단 한 번도
아니 때인
군불
뒤란에는 삭정이
앞산이예요!

 

 

가을 햇볕 - 안도현

가을 햇볕 한마당 고추 말리는 마을 지나가면
가슴이 뛴다
아가야
저렇듯 맵게 살아야 한다
호호 눈물 빠지며 밥 비벼먹는
고추장도 되고
그럴 때 속을 달래는 찬물의 빛나는
사랑도 되고

 

 

까만 씨가 박힌 가을을 - 박남수

 

까만 씨가 박힌 가을을
봉지에 털어 넣으면,
이 한 해도 거의 가기는 갔습니다.

찬바람이 잘 돌아
씨 주머니가 늘어져 건들거리는
가을의 가랑이가 썰렁한 날씨입니다.

거두어 넓어지는 하늘에는
맑은 햇빛이 타고,
이제 농부는 쉬어도 좋겠습니다.

 

 

가을 모서리 - 박정만

슬픔이 서리기둥처럼 하얗게 섰다.
천하(天下)의 가을 모서리,
기(氣)도 옆으로 팍 꺾이고
참깨 다발만 사선(斜線)으로 묶여 있는 오후.

네로 황제 목소리로 내리는 어둠.

 

 

가을은 깊어가고 - 류제희

처마 끝
매달린 마늘접이 바사삭 바사삭
바람에 제 무게를 덜어내고

맨드라미 속살 시뻘겋게
곪아가는 상처의 아픔을 가늠할 때

햇살로 영그는 동부꼬투리
속 우주
출렁인다

 

 

가을의 언어 - 성낙희

 

깊어지기를.
은두레박줄 풀어 내려
석달 열흘 잘 익은
씨앗의 무게와 향기.
바람이 햇볕에게
햇볕이 바람에게
그렇게 하듯 넉넉히
서두르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그대 말씀동의하면서
익어지기를.

 

 

가을 석양 - 류제희

빨간 고추잠자리 몇 마리
저녁 노을 지고 나릅니다.
뼈대만 남은 고추밭 가에
욕망이 들끓던 시절
그림자만 길게 붙잡고 있습니다

 

 

또 가을이다 - 이승훈

 

피는
불이 되고
불은
연기가 된다
이제
나는 연기다
나는
풀풀풀 날린다
시간이
딸꾹질하는 뇌에는
연기만 가득하다
또 가을이다

 

 

가을 저녁 - 도종환

 

기러기 두 마리 날아가는 하늘 아래
들국화는 서리서리 감고 안고 피었는데
사랑은 아직도 우리에게 아픔이구나
바람만 머리체에 붐비는 가을 저녁.

 

 

아버지의 가을 - 정호승

 

아버지 홀로
발톱을 깎으신다

바람도 단풍 든
가을 저녁에

지게를 내려놓고
툇마루에 앉아

늙은 아버지 홀로
발톱을 깎으신다

 

 

가을 그림자 - 김재진

 

가을은 깨어질까 두려운 유리창
흘러온 시간들 말갛게 비치는
갠 날의 연못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찾으러
집 나서는
황혼은
물 빠진 감잎에 근심 들이네.
가을날 수상한 나를 엿보는
그림자는 순간접착제.
빛 속으로 나선 여윈 추억 들춰내는
가을은
여름이 버린 구겨진 시간표.

 

 

가을의 창문을 열면 - 이외수

 

어디쯤 오고 있을까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도
깊어지는 사람 하나
단풍나무 불붙어
몸살나는 그리움으로
사태질 때

 

 

어느 가을 - 정채봉

 

물 한방울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듭니다
내일 아침에는
새하얀 서리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운 수개리 26 - 김일태

-이 가을 지면

 

감나무 가지 끝에 매단 위대한 생각
온 하늘이 붉다

흙담 위 겁 많은 고양이
고추잠자리 저공비행에
헛발질만 잦고

이 가을 지고
마음 잦아들면
무서리 속에서도 소국 향기
노랗게 짙을까?

 

 

자화상 1 - 손인식

-붓16

 

가을걷이한 논길
홀로 가는
나는,
붓 한 자루 쥔
허허로운 가난뱅이

그러나
굽이 굽이 돌아 갈 길엔
먹빛 신화가 있어
이끄는 선현이 많아서
마음의
붓 한 자루 쥔
허허로운 백만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