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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예들의 모세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우주로 떠난 날

윤이보헬로리 2016. 3. 10. 13:14

흑인 노예들의 모세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우주로 떠난 날

 

인간은, 그가 가진 어떤 조건을 막론하고 평등하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이 보편적 진리가 당연해진 데는 기나긴 투쟁의 역사가 필요했다. 지금은 자유와 민주주의, 평등의 나라라고 불리며 흑인 대통령도 나온 미국에서 불과 150년 전에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인종차별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계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아직도 전과 똑같은 나인가 확인하기 위해 내 손을 쳐다보았다. 그 모든 것이 그렇게 찬란해 보일수가 없었다.’ -1849년 노예 해리엇 터브먼이 고향을 탈출 해 흑인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 북부 펜실베니아에 도착했을 때를 회고하는 글

 

“자유의 몸이 된 나는 과연 여기 서 있는 사람이 나 자신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내 손을 쳐다보았다. 사방이 온통 눈부시게 아름답게 보였는데, 태양은 마치 황금처럼 나무들 사이로, 벌판 위로 쏟아지고 있었고, 나는 마치 천국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자유였다. 하지만 자유의 땅에 발 디딘 나를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 낯선 곳에 온 이방인이었고, 내가 살던 집은 정든 이웃들과 형제, 자매들과 함께 저 아래쪽의 오두막집 동네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는 곧 엄숙한 결정을 내렸다. 나는 자유였고, 그들도 나처럼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나는 여기 북쪽에 그들을 위한 집을 짓고, 신의 가호가 있다면 그들을 모두 이곳으로 데리고 올 것이다.” -<레볼루션>


미국역사에 있어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을 몸소 실천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흑인 노예로 태어나 스스로 자유를 획득했고, 많은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찾도록 도왔으며, 죽을 때까지 인간의 평등에 대해 몸소 실천했던 해리엇 터브먼.

 

1913년 3월 10일 노예 해방 운동을 실천한 인권운동가이자 남북 전쟁 때 활동했던 스파이, 흑인노예들의 모세로 불리는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이 93세의 나이로 숨진 날이다.


해리엇 터브먼은 1820년 메릴랜드의 벅톤에서 아라민타 “거티” 로스라는 이름으로 노예였던 부모, 해리엣(“릿”) 그린과 벤 로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릿의 주인은 메리 패티슨 브로디스(이후 아들 에드워드에게로)였으며, 벤은 메리의 두 번째 남편 앤서니 톰슨의 소유로 메릴랜드 주 캠브릿지 근처 블랙워터 강에 큰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대부분의 미국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정확한 출생 시기나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는다.

 

5살부터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당시 많은 흑인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북쪽으로 떠났다. 정의감이 넘쳤던 15세 때 도망치는 노예를 돕기 위해 감시관에게 반항하다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고 크게 다친 그는 후유증으로 평생 동안 갑작스레 잠이 쏟아지는 수면발작에 시달리게 된다.

 

1849년 12월 6일 29살 때, 채찍질과 구타를 견디다 못해 메릴랜드에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북부의 백인 일부와 탈출한 흑인들이 만든 비밀조직으로 남북전쟁 전 노예들의 탈출을 도왔다)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로 떠나 필라델피아로 도망쳤다.

 

그녀는 자신의 안위만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얼마 후 다시 돌아와 가족과 친척 수십 명을 탈출시켰다.  

 

한 번에 한 그룹씩, 밤에만 은밀히 움직이는 방법으로 이들을 빼내갔다. 자신이 도망 간 사이 다른 여성과 결혼한 남편을 탈출시키려다 거부당하기도 했다.

 

이후 그녀는 반노예 운동단체에 가입, 10여년간 300여 명의 흑인 노예들을 북부로 탈출시켰다. 위험한 고비가 적지 않았지만 여행객으로 위장한 그녀의 수법은 매우 뛰어나서 기지와 임기응변을 발휘하며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

 

그 이유는 대담하고 당찬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북쪽으로 떠나는 도중에 노예들이 두려움에 마음이 약해지면, 해리엇은 들고 있던 총으로 그들을 겨누며 “자유와 죽음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했다.

 

물론 실제로 그가 총을 쏜 적은 없지만, 결단력을 환기시켜줌으로써 노예들에게 용기를 주는 데 성공했다.


자신들을 추적하는 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다양한 트릭을 썼다. 노예를 잡으러 온 사람들은 대체로 개를 이용했다. 그래서 길에 후추를 뿌리거나 물을 따라 걷는 방법을 사용했다.

 

당시 노예들은 법적으로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노예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도구로 여성들의 ‘퀼트’가 활용됐다.

 

특정한 패턴이 수놓아진 퀼트가 창문에 걸려있으면, 노예들은 그 패턴을 읽어내어 언제 떠나고, 언제 숨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1850~1860년 사이에 19차례나 노예 탈출을 시도했다. 추적자들을 피하기 위해 트릭들을 썼다.

 

어느 날, 노예들과 막 기차를 타려고 할 때 그들을 추적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왔다. 그러자 해리엇은 노예들을 남쪽 행 기차에 태워 보내어 의심을 피했다.

 

메릴랜드에서 노예 소유주와 마주칠 때면, 해리엇은 재빨리 닭을 사서 길바닥에 내려놓았다. 닭들이 털을 날리며 뛰어다니면 노예 소유주들은 닭을 피해 걸어갔다.

 

노예제 폐지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해리엇은 북측의 정보원으로 일하는가 하면 병원에서 병사들을 간호한다.

 

뿐만 아니라 150명의 흑인 군인을 직접 이끌고 싸워 약 800여명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돈을 모아서 나이 들고 갈 곳 없는 흑인들을 위해 집을 지었다.


해리엇의 일생은 이후에도 차별 철폐를 외치는 수많은 미국의 흑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그녀의 치열한 삶이 오늘날 미국의 자유와 평등을 앞당기는데 큰 역할을 했음은 분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