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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A형만 소심하다고? 당신 안에 숨겨진 소심함의 진실
윤이보헬로리
2014. 4. 25. 10:10
1. 소심한 자들의 도시
인터넷에서 보는 흔한 이야기. A형이랑 B형이랑 O형이랑 AB형이 밥을 먹고 있다. 괴팍한 AB형이 갑자기 밥상을 엎어버리고 나간다. 그러면 O형은 일단 쫓아나간다. B형은 아무 신경쓰지 않고 그냥 먹던 밥 먹는다. 그렇다면 A형은? '혹시 내 탓 아닌가?', '내가 저 친구 신경을 건드렸나?' 하면서 고민고민한다.
내 경험상, 실제로 사람들은 혈액형과 무관하게 A형의 행동방식에 가장 많이 공감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라. 밥먹다 갑자기 밥상 엎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그런 돌발상황에서 신속하게 따라나서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무서우니까, 혹은 달랜다고 달래질지 확신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그런 상황에서 자기 하던 일만 계속 하는 강심장or냉혈한 역시 드물다. 가장 쉬운 건 그 자리에 엉거주춤 앉아서 자기 행동을 반추하는 거다. 즉 '소심'하게 반응하는 것. 자신이 대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반해 소심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건, 사람들이 겸손해서라기보단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심함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검열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되돌아보는 것, 그것이 아름답고 모범적인 모습에서 어긋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는 것. 아마 위의 사례에서도 소심한 A형의 고민의 초점은, '내가 친구로서, 혹은 동료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는 않았나?'일 것이다. 즉 소심함이란, 내가 경계를 넘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반복적인 (혹은 강박적인?) 자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반성에는 끝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마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하는 신자는 철저한 자기검열을 통해 죄를 고백한 후 이렇게 말한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죄까지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일까지 혹시 잘못된 것은 없었나 되짚어보는 소심한 자들의 강박증! 때문에 소심한 사람은 더욱 더, 그리고 끝없이 소심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은 늘 있는 법이니, 내가 모르는 내가 저지르고 다녔을 죄 (?) 를 반성하는 일 역시 끝이 있을리 없지 않은가? 이같은 무한반성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망각이다. 아마 사람들이 술을 그토록 처먹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어린왕자가 술주정꾼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왜 술을 마셔요?" 술주정꾼은 말했다. "잊어버리려고 마신다." 어린왕자는 물었다. " 무엇을 잊어버려요?" 술주정꾼은 말했다. "부끄러운 걸 잊어버리려고." 어린왕자는 물었다. "무엇이 부끄러워요?" 술주정꾼은 말했다. "술을 마시는 것이 부끄러워."
그런 의미에서 소심함은 근본적으로 모범생 콤플렉스 혹은 착한아이 콤플렉스에 가깝다. 끊임없이 자기 행동을 감시하며 모범적이고 착한 나를 만들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소심한 자들이 늘어나는 것. 그것은 모범생이고 싶은, 착한아이이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질문. '착한아이'가 많아진다는 건, 사회가 좀더 좋아지고 있다는 뜻인가?
2. 소심함의 메커니즘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모범생이나 착한아이는 선생님 입장에서나 좋은 것이지, 정작 본인들은 상당히 피곤한 삶을 살게 마련이다. 항상 욕망해도 '되는' 것만을 욕망하고, 행동'해야하는' 방식대로 행동하는 삶이 좋을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이 소심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모범생이나 착한아이가 되고 싶어서 그런거요."라고 말하면 크게 화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그런 모범생이나 착한아이의 삶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항상 윗사람을 공경하고 시키는대로 사는 삶은 따분하고 구차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정말 희한하게도, 그런 사람들이 실제 상황에서는 다들 그런 모범생이나 착한아이가 된다. 문제가 생기면 그냥 양보하는 것보단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게 더 낫다고 다들 말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대개 그냥 양보한다. (혹은 침묵한다) 그리고 돌아와 후회한다. "난 왜 이렇게 소심할까?" 정말이지 소심해지고 싶지 않은데, 실제로는 소심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가득하다. 마음으로는 다들 한 마리 늑대마냥 고독하게 자존심을 지키고 싶지만, 실제로는 양떼와 같이 온순하게 살아간다. 왜 이런 걸까?
푸코라면, 습관과 무의식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수많은 권력장치에서 그 원인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현대 권력장치는 더이상 직접적으로 신체나 생각에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습관과 무의식에 작동한다. 학교나 직장에 갈 때, 이성적으로 학교/직장에 가는게 더 좋다고 판단해서 가는가? 그렇지 않다. 습관적으로 가는 거다. 상사 앞에서 공손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행동하는가? 그렇지 않다. 습관적으로 하는 거다.
이런 습관을 몸에 배게 하기 위해, 우리는 무던히도 맞았다. 늦으면 맞고 운동장을 돈다. 짝다리 짚고 선생님 앞에서 껌 씹으면 맞는다. 권력장치의 처벌에 설명이란 없다. 내가 왜 맞아야 하냐고 물으면 더 맞는다. 물음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그냥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자동으로 공손하게 굴 때까지 맞는다. 권력장치는 합리적 설명 대신, 그런 설명에 대한 욕구를 지워버린,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만들려고 한다.
즉 우리가 소심한 것은, 착한아이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은, 우리가 모범생이나 얌전한 시민을 '의식적'으로 선호해서가 아니다. 학교-군대-직장을 거치며 그런 습관과 무의식이 만들어져서 그런 거다. 술자리에서는 호기롭게 이야기하다가도 실제 상황에서는 착한아이 본능이 발동되는 수많은 사람들. 그건 사람들이 겁을 먹어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겁이고 뭐고 생각하기 전에 그냥 몸이 먼저 착한아이 스타일로 반응하는 것이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고마운 일이다. 알아서 경찰 말도 잘 듣고, 쓸데없이 시민들끼리 싸우지도 않는다. 선생이나 상사에게 개기지도 않는다. 열심히 착한아이 모범생으로 일하고 공부한다.

특정한 표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정신병 취급하는 각종 앎의 체계 역시 이런 경향을 가속화하는 주요 원인이다. 개인이 위에서 말한 습관들을 제대로 가지지 못했을때, 그건 그냥 단순히 '착한아이'가 되지 못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앎의 체계는 표준에서 이탈한 이들을 '병자'로 만들어버린다.
수많은 '증후군'을 보라. 뚜렷이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병을 지칭할 때 쓰이는 '증후군'은 정말 모든 곳에 붙여진다. 직장인이 로봇처럼 일에만 집중하지 못할 때는 '만성 피로 증후군', 전교1등처럼 "공부가 재밌어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초딩들은 '주의력 결핍 증후군' 판정을 받는다. (권력의 눈에)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죄다 병이 된다. 이제 착한아이/모범생이 아니라는 말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병자'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더욱 소심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온갖 근거없는 심리테스트의 범람을 보라. '혹시 내 아이가 주의력 결핍은 아닐까?', '혹시 내가 쉽게 흥분하는 폭력 유전자를 가진 건 아닐까?', '혹시 내가?' ... 이와 같은 검열의 메커니즘은 '과학'이라는 (사실은 근거가 희박한) 이름을 얻으면서 더욱 전능해지고 무한해진다.
*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 : 소위 ADHD로 잘 알려져 있다. 아동이 산만함과 충동성이 학습장애를 가져올때 내리는 진단명이다. 이에 대한 치료는 대개 약물 처방이다. 그러나 오히려 ADHD 판정이 더 과다하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그 근거로는 남아가 여아보다 ADHD 판정을 받는 경우가 더 흔하며, 무엇보다 ADHD라는 병명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후 후 이러한 판정을 받는 아동들이 매우 많아졌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에너지 넘치는 시기의 아동이 어른들이 바라는대로 '주의력있게', '침착하게',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은 아닐까?
흉악 범죄들에 '사이코패스'같은 정체불명의 정신병이 부여되는 것은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살필 수 있다. 물론 연쇄살인은 정말 나쁜 일이다. 그러나 사이코패스같이 딱히 근거없는 '설명불가능성'이 그 병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정신병을 통해 살인을 설명할 때 발생하는 효과는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 인구의 10%가 '비정상적'인 감정 메커니즘을 가진 사이코패스의 경향이 있다고 전문가들이 말할 때, 사람들은 '혹시 내가...?', '혹시 내 아이가...?' 하면서 돌아보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른바 '정상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사소한 행동에도 사이코패스를 목격하고 서둘러 이를 교정하려 한다. 내 자녀가 친구와 싸울 때, 눈물을 흘리며 뜨겁게 화해하는 청춘드라마 주인공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깜짝 놀라 자녀를 다그칠 지도 모른다. " 나중에 연쇄살인범 되려고 그러냐?" 요컨대 앎의 체계는 착한아이와 모범생으로 상징되는 정상/표준에서 이탈하는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하나의 종으로 만들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사람들의 자기검열을 무한하게, 그리고 세밀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병의 '징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심한 건, 단순한 성격문제가 아니다. A형이라는 혈액형 탓도 아니고, 대범하지 못한 천성 탓도 아니란 말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그것은 끊임없이 정상과 표준을 향하도록 하는 권력장치의 결과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를 소심하게 만들려는 음흉한 기획자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권력이란, 그냥 사람들이 서로 관계맺고 작동하는 양상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누가 특별히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조종한다기보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자박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얻어맞던 학생도 크고 나면 때리는 선생이 되고, 학생들끼리 또래의 올바른 자세를 서로 강요하기도 하며, 일상 속에서 자신에게 병을 의심하는 건 전문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지 않은가?
소심함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은 지금 정상/표준을 중심으로 짜인 우리의 인간관계를 바꾼다는 것이기도 하다. 보다 더 다양한 방법으로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 소심함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예의바르지만 서로 개입하지는 않는 착한아이들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거칠게 개입하고 서로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는 관계를 실천할 수 있다. 아니, 거꾸로 그런 관계를 '실천'할때, 우리는 우리의 소심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이 땅의 소심한 이들이여! 자신의 소심함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 어떤 표준과 정상에 대한 습관적 갈망이 숨어있는지 찾아내자. 그걸 똑바로 응시하는 것, 그것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습관을 만들어가는 것. 그때 우리는 조금이나마 대범하게 세상과 마주할 수 있으리라.
내 경험상, 실제로 사람들은 혈액형과 무관하게 A형의 행동방식에 가장 많이 공감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라. 밥먹다 갑자기 밥상 엎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그런 돌발상황에서 신속하게 따라나서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무서우니까, 혹은 달랜다고 달래질지 확신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그런 상황에서 자기 하던 일만 계속 하는 강심장or냉혈한 역시 드물다. 가장 쉬운 건 그 자리에 엉거주춤 앉아서 자기 행동을 반추하는 거다. 즉 '소심'하게 반응하는 것. 자신이 대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반해 소심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건, 사람들이 겸손해서라기보단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심함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검열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되돌아보는 것, 그것이 아름답고 모범적인 모습에서 어긋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는 것. 아마 위의 사례에서도 소심한 A형의 고민의 초점은, '내가 친구로서, 혹은 동료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는 않았나?'일 것이다. 즉 소심함이란, 내가 경계를 넘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반복적인 (혹은 강박적인?) 자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반성에는 끝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마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하는 신자는 철저한 자기검열을 통해 죄를 고백한 후 이렇게 말한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죄까지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일까지 혹시 잘못된 것은 없었나 되짚어보는 소심한 자들의 강박증! 때문에 소심한 사람은 더욱 더, 그리고 끝없이 소심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은 늘 있는 법이니, 내가 모르는 내가 저지르고 다녔을 죄 (?) 를 반성하는 일 역시 끝이 있을리 없지 않은가? 이같은 무한반성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망각이다. 아마 사람들이 술을 그토록 처먹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어린왕자가 술주정꾼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왜 술을 마셔요?" 술주정꾼은 말했다. "잊어버리려고 마신다." 어린왕자는 물었다. " 무엇을 잊어버려요?" 술주정꾼은 말했다. "부끄러운 걸 잊어버리려고." 어린왕자는 물었다. "무엇이 부끄러워요?" 술주정꾼은 말했다. "술을 마시는 것이 부끄러워."
그런 의미에서 소심함은 근본적으로 모범생 콤플렉스 혹은 착한아이 콤플렉스에 가깝다. 끊임없이 자기 행동을 감시하며 모범적이고 착한 나를 만들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소심한 자들이 늘어나는 것. 그것은 모범생이고 싶은, 착한아이이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질문. '착한아이'가 많아진다는 건, 사회가 좀더 좋아지고 있다는 뜻인가?
2. 소심함의 메커니즘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모범생이나 착한아이는 선생님 입장에서나 좋은 것이지, 정작 본인들은 상당히 피곤한 삶을 살게 마련이다. 항상 욕망해도 '되는' 것만을 욕망하고, 행동'해야하는' 방식대로 행동하는 삶이 좋을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이 소심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모범생이나 착한아이가 되고 싶어서 그런거요."라고 말하면 크게 화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그런 모범생이나 착한아이의 삶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항상 윗사람을 공경하고 시키는대로 사는 삶은 따분하고 구차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정말 희한하게도, 그런 사람들이 실제 상황에서는 다들 그런 모범생이나 착한아이가 된다. 문제가 생기면 그냥 양보하는 것보단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게 더 낫다고 다들 말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대개 그냥 양보한다. (혹은 침묵한다) 그리고 돌아와 후회한다. "난 왜 이렇게 소심할까?" 정말이지 소심해지고 싶지 않은데, 실제로는 소심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가득하다. 마음으로는 다들 한 마리 늑대마냥 고독하게 자존심을 지키고 싶지만, 실제로는 양떼와 같이 온순하게 살아간다. 왜 이런 걸까?
푸코라면, 습관과 무의식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수많은 권력장치에서 그 원인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현대 권력장치는 더이상 직접적으로 신체나 생각에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습관과 무의식에 작동한다. 학교나 직장에 갈 때, 이성적으로 학교/직장에 가는게 더 좋다고 판단해서 가는가? 그렇지 않다. 습관적으로 가는 거다. 상사 앞에서 공손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행동하는가? 그렇지 않다. 습관적으로 하는 거다.
이런 습관을 몸에 배게 하기 위해, 우리는 무던히도 맞았다. 늦으면 맞고 운동장을 돈다. 짝다리 짚고 선생님 앞에서 껌 씹으면 맞는다. 권력장치의 처벌에 설명이란 없다. 내가 왜 맞아야 하냐고 물으면 더 맞는다. 물음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그냥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자동으로 공손하게 굴 때까지 맞는다. 권력장치는 합리적 설명 대신, 그런 설명에 대한 욕구를 지워버린,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만들려고 한다.
즉 우리가 소심한 것은, 착한아이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은, 우리가 모범생이나 얌전한 시민을 '의식적'으로 선호해서가 아니다. 학교-군대-직장을 거치며 그런 습관과 무의식이 만들어져서 그런 거다. 술자리에서는 호기롭게 이야기하다가도 실제 상황에서는 착한아이 본능이 발동되는 수많은 사람들. 그건 사람들이 겁을 먹어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겁이고 뭐고 생각하기 전에 그냥 몸이 먼저 착한아이 스타일로 반응하는 것이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고마운 일이다. 알아서 경찰 말도 잘 듣고, 쓸데없이 시민들끼리 싸우지도 않는다. 선생이나 상사에게 개기지도 않는다. 열심히 착한아이 모범생으로 일하고 공부한다.
시민이 먼저 외쳤던 '비폭력'과 '준법' 시위의 구호. 그러나 우리는 '왜 평화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특정한 표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정신병 취급하는 각종 앎의 체계 역시 이런 경향을 가속화하는 주요 원인이다. 개인이 위에서 말한 습관들을 제대로 가지지 못했을때, 그건 그냥 단순히 '착한아이'가 되지 못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앎의 체계는 표준에서 이탈한 이들을 '병자'로 만들어버린다.
수많은 '증후군'을 보라. 뚜렷이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병을 지칭할 때 쓰이는 '증후군'은 정말 모든 곳에 붙여진다. 직장인이 로봇처럼 일에만 집중하지 못할 때는 '만성 피로 증후군', 전교1등처럼 "공부가 재밌어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초딩들은 '주의력 결핍 증후군' 판정을 받는다. (권력의 눈에)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죄다 병이 된다. 이제 착한아이/모범생이 아니라는 말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병자'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더욱 소심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온갖 근거없는 심리테스트의 범람을 보라. '혹시 내 아이가 주의력 결핍은 아닐까?', '혹시 내가 쉽게 흥분하는 폭력 유전자를 가진 건 아닐까?', '혹시 내가?' ... 이와 같은 검열의 메커니즘은 '과학'이라는 (사실은 근거가 희박한) 이름을 얻으면서 더욱 전능해지고 무한해진다.
*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 : 소위 ADHD로 잘 알려져 있다. 아동이 산만함과 충동성이 학습장애를 가져올때 내리는 진단명이다. 이에 대한 치료는 대개 약물 처방이다. 그러나 오히려 ADHD 판정이 더 과다하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그 근거로는 남아가 여아보다 ADHD 판정을 받는 경우가 더 흔하며, 무엇보다 ADHD라는 병명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후 후 이러한 판정을 받는 아동들이 매우 많아졌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에너지 넘치는 시기의 아동이 어른들이 바라는대로 '주의력있게', '침착하게',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은 아닐까?
흉악 범죄들에 '사이코패스'같은 정체불명의 정신병이 부여되는 것은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살필 수 있다. 물론 연쇄살인은 정말 나쁜 일이다. 그러나 사이코패스같이 딱히 근거없는 '설명불가능성'이 그 병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정신병을 통해 살인을 설명할 때 발생하는 효과는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 인구의 10%가 '비정상적'인 감정 메커니즘을 가진 사이코패스의 경향이 있다고 전문가들이 말할 때, 사람들은 '혹시 내가...?', '혹시 내 아이가...?' 하면서 돌아보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른바 '정상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사소한 행동에도 사이코패스를 목격하고 서둘러 이를 교정하려 한다. 내 자녀가 친구와 싸울 때, 눈물을 흘리며 뜨겁게 화해하는 청춘드라마 주인공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깜짝 놀라 자녀를 다그칠 지도 모른다. " 나중에 연쇄살인범 되려고 그러냐?" 요컨대 앎의 체계는 착한아이와 모범생으로 상징되는 정상/표준에서 이탈하는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하나의 종으로 만들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사람들의 자기검열을 무한하게, 그리고 세밀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병의 '징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심한 건, 단순한 성격문제가 아니다. A형이라는 혈액형 탓도 아니고, 대범하지 못한 천성 탓도 아니란 말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그것은 끊임없이 정상과 표준을 향하도록 하는 권력장치의 결과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를 소심하게 만들려는 음흉한 기획자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권력이란, 그냥 사람들이 서로 관계맺고 작동하는 양상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누가 특별히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조종한다기보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자박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얻어맞던 학생도 크고 나면 때리는 선생이 되고, 학생들끼리 또래의 올바른 자세를 서로 강요하기도 하며, 일상 속에서 자신에게 병을 의심하는 건 전문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지 않은가?
소심함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은 지금 정상/표준을 중심으로 짜인 우리의 인간관계를 바꾼다는 것이기도 하다. 보다 더 다양한 방법으로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 소심함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예의바르지만 서로 개입하지는 않는 착한아이들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거칠게 개입하고 서로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는 관계를 실천할 수 있다. 아니, 거꾸로 그런 관계를 '실천'할때, 우리는 우리의 소심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이 땅의 소심한 이들이여! 자신의 소심함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 어떤 표준과 정상에 대한 습관적 갈망이 숨어있는지 찾아내자. 그걸 똑바로 응시하는 것, 그것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습관을 만들어가는 것. 그때 우리는 조금이나마 대범하게 세상과 마주할 수 있으리라.
출처 : 사 회 민 주 주 의 센 터
글쓴이 : 일어나라 사민이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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